Page 9 - 어포삼랑13호 9-10월 합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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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총명했던 사도세자가 27살이

                                                     란 젊은 나이에 뒤주에 갇혀 죽은 데는 당
                                                     시 당파정치의 영향도 있습니다. 영조의

                                                     아버지인 숙종 때 인현왕후가 속해 있던
                                                     서인은 장희빈 사건을 계기로 노론과 소론

                                                     으로 나뉩니다. 노론은 장희빈에게 사약
                                                     을 내리는 것을 지지한 파이고, 소론은 반

                                                     대한 파입니다. 사도세자를 지지한 세력은
                                                     소론입니다. 그런데 사도세자가 15세가
                   정조가 쓴 편액이 달린 화성장대                 되어 영조가 대리청정을 명했을 때, 을해

                                                     옥사로 많은 소론이 잡혀 죽었습니다. 이

               때 노론은 소론을 완전히 제거하자 했으나 사도세자는 반대합니다. 이에 노론은
               영조가 정한 지침을 아들인 세자가 뒤집으려 한다며 세자에 대한 모함을 합니다.



                마침내, 영조38년, 사도세자가 반란을 도모했다는 ‘나경언의 고변’ 후 영조는 세

               자를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대신들도 들어오지 못하게 한 자리였습니다.


                                    “내가 죽으면 300년 종사가 망하고,

                                 네가 죽으면 300년 종사는 유지될 것이니,

                                     지금 이 자리에서 속히 자결하라.”



                영조는 창경궁 문정전 앞에 뒤주를 놓고 뒤주에 들어가라 명합니다. 살려달라는
               아들에게 영조는 뒤주에 직접 못을 박는 것으로 대답합니다.



                사도세자가 죽기 2달 전, 부소가 죽음을 받아들인 게 진짜 효孝인지를 묻는 질문

               을 신하들에게 했다는 기록이 <평암집>에 있습니다. 부소는 진시황의 큰 아들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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