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 - 어포삼랑13호 9-10월 합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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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둘 수 없어 9살에 죽은 자신의 첫째 아들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킵니다. 정

               조가 동궁이 되면서 혜경궁 홍씨는 다시 입궐하지만, 더 이상 법적으로 정조의 어
               미는 아니게 되었습니다. 사도세자도 더 이상 정조의 법적인 아버지가 아닌 것처
               럼요.

                정조가 동궁이 되었으나, 노론은 정조의 등극을 노골적으로 반대합니다. 연산군

               때의 일로 멸문지화를 당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조는 1776년 3월
               10일 마침내 등극하고, 즉위식 자리에서 선포합니다.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가 사도세자를 기리는 마음, 수원화성

                왕의 무덤은 ’릉‘이라 부르고, 세자나 세자빈의 무덤은 ’원‘, 다른 왕족의 무덤은
               ’묘‘라고 부릅니다. 사도세자는 죄인으로 죽어 세자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기 때

               문에 사후 ’수은묘‘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정조는 즉위 후 아버지의 죽음을 바로
               잡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수은묘‘란 이름을 ’영우원‘으로 승격시키고, 1789년엔

               당시 명당으로 알려진 ’수원도호부‘ 자리로 묘를 옮겨 ’현륭원‘이라 부릅니다.



                당시 수원의 관청이 있던 수원도호부에는 244호, 677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정
               조는 이들에게 이주비와 보상금을 주어 팔달산 기슭에 자리한 현재의 수원화성

               으로 옮기게 하고, 이곳을 계획도시, 신도시로 건설해 갑니다. ’조선 성곽 건축의
               꽃‘이라 불리는 수원화성은 이때 ’화성(華城)‘이란 신도시를 건축하는 과정에서

               축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수원화성‘이란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신도시 ’화
               성‘이고, 다른 하나는 신도시를 둘러싼 성곽인 ’화성‘입니다.



                수원화성과 현재의 경기도 화성시는 화성시로 분리되기 전에는 같은 역사를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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